- 펠레 이후 축구에서 10번은 전통적으로 에이스를 상징하는 번호로 통했다.
- 1979년 일본 세계 청소년 대회를 통해 세계 무대에 데뷔한 마라도나는 탄력적인 드리블과 엄청난 왼발 능력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 조국에 사상 두 번째 월드컵을 안긴 멕시코 대회 이후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넘버 10으로 자리매김했다.
[골닷컴, 카타르 도하] 김형중 기자 = 월드컵 2회 우승에 빛나는 남미의 축구 강호 아르헨티나. 이 나라 만큼 숫자 10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와 10번. 펠레 이후 축구에서 10번은 전통적으로 에이스를 상징하는 번호로 통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펠레 이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오스마르 시보리 등도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 혜성같이 나타난 10대 소년보다 임팩트가 컸던 10번은 없었다.
디에고 알만도 마라도나. 1979년 일본 세계 청소년 대회를 통해 세계 무대에 데뷔한 마라도나는 탄력적인 드리블과 엄청난 왼발 능력으로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이후 1982 스페인 월드컵을 거쳐 전성기의 기량으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신의 손’ 논란도 있었지만, 왼발 하나로 6명을 제치고 골망을 흔든 8강 잉글랜드전 득점은 지금까지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골로 칭송 받는다. 조국에 사상 두 번째 월드컵을 안긴 멕시코 대회 이후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넘버 10’으로 자리매김했다.

마라도나가 1994년 대표팀을 떠난 이후 아르헨티나에는 ‘제 2의 마라도나’라는 별명과 함께 10번을 단 선수들이 등장했다. 아리엘 오르테가, 후안 리켈메, 파블로 아이마르 등이 10번 계보를 이었지만 황제의 자리까지 이어받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러던 중 마라도나와 같이 작은 체구의 한 선수가 2006 독일 월드컵을 통해 꿈의 무대에 데뷔했다. 당시에는 19번을 달고 뛰었지만 누가 봐도 아르헨티나 10번 다운 플레이를 펼쳤다. 리오넬 메시, 그는 리켈메 은퇴 후 대표팀 10번 셔츠를 꿰차며 마라도나 후계자에 도전했다. 그리고 마라도나가 나폴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수많은 우승 트로피와 함께 팬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았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었으니 바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였다. 2006년부터 4번의 도전이 있었지만, 문턱에서 좌절했던 2014년 준우승이 최고의 성적이었다. 클럽 커리어에선 마라도나를 넘어섰지만 아직도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를 양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월드컵에 대한 갈증 때문이다. 그는 이번 카타르에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그리고 27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멕시코를 상대로, 자신이 직접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아르헨티나를 위기에서 구해냈고 그 도전을 이어갔다.

이렇게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두 명의 10번이 존재한다. 실제로 멕시코전이 열린 카타르 루사일 스타디움에는 수많은 하늘색 줄무늬 10번 유니폼이 넘실거렸다. 대다수의 유니폼을 차려 입은 팬들은 10번과 아무 번호가 없는 사람들로 구분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10번 위에는 MESSI라고 적혀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전히 MARADONA라 쓰여있는 유니폼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난 26일은 마라도나의 2주기 추모가 있던 날이었다. 이 날을 기념해 10번 메시는 꺼져만 가던 아르헨티나의 불씨를 극적으로 살려냈고, 또 다른 10번 마라도나의 발자취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