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한국 축구와 결혼한 신임 국가대표팀 감독인데, 부임 4경기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면?
- 9일 부임 기자회견에 참석했고, 첫 대표팀 소집에서 콜롬비아와 2-2로 비겼고, 우루과이에 1-2로 패했다.
- 벤투호에서 클린스만호로 넘어가는 작업은 불가피하다.
허니문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 상황은? 결혼식 직후부터 싸운 상태로 비행기를 타거나, 신혼여행 내내 다투거나, 귀국편 비행기에서 분을 참지 못해 문을 열어젖히거나 등등이다. 당신이 한국 축구와 결혼한 신임 국가대표팀 감독인데, 부임 4경기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면? 흠…
지난 3월 8일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한국에 도착했다. 9일 부임 기자회견에 참석했고, 첫 대표팀 소집에서 콜롬비아와 2-2로 비겼고, 우루과이에 1-2로 패했다. 언론과 팬들은 결과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클린스만 감독은 능숙한 언변으로 지도자 행적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잠재웠고, 첫 2연전은 그의 데뷔전보다 벤투호의 2022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 성공을 축하하는 무대에 가까웠다. 완벽한 허니문.
6월 들어 두 번째 대표팀 소집이 이루어졌다. 클린스만호의 ‘진짜’ 데뷔전은 시작 전부터 삐그덕거렸다. 주전들이 부상, 군사 훈련, 중국 구금 등 다양한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 주장 손흥민의 몸까지 온전하지 않았다. 차 떼고 포 뗀 클린스만호는 노련한 페루에 0-1로 패했다. 나흘 뒤, FIFA랭킹 74위 엘살바도르와 1-1 무승부가 이어졌다. 엘살바도르전 막판 1-1 동점을 허용하자 대전월드컵경기장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무음이야말로 상황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설명이었다.
앞선 설명처럼 6월 A매치 2연전을 치른 클린스만호의 상태는 비정상이었다. 벤투호에서 클린스만호로 넘어가는 작업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과도기가 너무 급하게 강요된 느낌이다. 주축 절반이 날아간 상태로 시작한 페루전과 엘살바도르전은 후반 교체를 통해 백업의 백업, ‘새얼굴’의 ‘새얼굴’로 마무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긍정적 경기력을 기대하긴 어렵다. 특히 비교 대상이 2022년 카타르월드컵 본선 4경기라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 16강 진출을 확정하기 전까지 벤투호를 향한 한국 축구의 민심이 어땠는지를 잊어선 곤란하다. (인생은 한 방!)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6월 A매치 2연전 덕분에 한국 축구는 카타르월드컵의 달콤한 꿈에서 깰 수 있었다. 축구에서 주전 경쟁은 정글 그 자체다. 삐끗하면 밥그릇이 날아간다. 카타르월드컵에서 9번 자리의 순위는 황의조와 조규성이었고 오현규는 아예 없었다. 6개월 후 우선순위는 정확히 뒤집어졌다. 페루전에서 클린스만 감독은 오현규를 선발로 냈고, 조규성과 황의조가 차례대로 교체 출전했다.
풀백 포지션 경쟁도 뜨겁다. 라이트백에서 설영우, 레프트백에서 박규현이 치고 나왔다. 카타르월드컵 2선 벤치였던 이강인은 선발뿐 아니라 아예 팀의 간판 역할까지 꿰찼다. 강산이 바뀌는 데 10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국가대표팀에서 6개월이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다.
홍현석과 박규현의 발탁과 출전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알다시피 벤투호 코칭스태프는 전원 국내에 머물면서 K리그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클린스만호는 다르다. 코치들이 유럽에 머문다. 유럽파 현장 점검의 결과를 강조라도 하듯이 전임 체제에선 거론되지 않았던 ‘마이너 유럽파’들이 출전 기회를 얻었다. 어느 코칭스태프나 스타일과 취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달랑 4경기만 놓고 본다면, 클린스만호에서는 K리그보다 유럽 어디든 뛰는 선수가 유리할지 모른다. 물론 이 부분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답이 나온다. 섣부르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클린스만 감독은 페루전을 마치고 “패배 결과에 나도 화가 난다”라고, 엘살바도르전을 마치고 “훈련을 더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감독 본인도 언제까지 미소만 짓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연속 패배는 악영향이 크다. 엘살바도르전 후, 황인범은 “대표팀이든 소속팀이든 승리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 불안감이 생긴다”라고 인정했다. 대표팀의 다음 일정은 9월 유럽 원정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유럽행의 목적은 경험 쌓기보다 승리해서 자신감 얻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감독 스스로 밝힌 것처럼 클린스만호의 1차 목표는 2023년 1월 AFC아시안컵이다. 클린스만호 평가는 아시안컵이 끝난 뒤에 이루어져야 공평하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표시할 수 있는 최대치는 허니문 종료 선언 정도다. 이번 북중미 2개국 평가전이 그런 구실을 했다. 비에 젖은 대전월드컵경기장을 집어삼켰던 침묵이 그래서 정말 인상 깊었다. 한국 축구는 카타르월드컵이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고, 클린스만호는 3개월짜리 허니문을 슬슬 정리해야 할 때다.